1992년 8월 11일 오전 8시 8분 39초. 대한민국 국민 모두가 숨죽여 지켜본 가운데 남미 프랑스령 기아나클 기지에서 마침내 한국과학기술원(KAIST) 연구진이 개발한 소형 인공위성인 ‘우리별 1호’가 성공적으로 발사됐습니다. 무게 48.6kg, 크기 35x35x67cm의 초소형 위성이었지만 당시로서는 세계 22번째이자 아시아에서는 일본에 이어 두 번째로 독자적인 우주개발 시대를 열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컸습니다. 대한민국 최초 인공위성 우리별 1호 1992년 8월 11일 오전 8시 8분 39초. 대한민국 국민 모두가 숨죽여 지켜본 가운데 남미 프랑스령 기아나클 기지에서 마침내 한국과학기술원(KAIST) 연구진이 개발한 소형 인공위성인 ‘우리별 1호’가 성공적으로 발사됐습니다. 무게 48.6kg, 크기 35x35x67cm의 초소형 위성이었지만 당시로서는 세계 22번째이자 아시아에서는 일본에 이어 두 번째로 독자적인 우주개발 시대를 열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컸습니다. 대한민국 최초 인공위성 우리별 1호
특히 군사 목적이 아닌 순수 과학 연구용으로는 처음이었습니다. 그럼 왜 하필 이름을 ‘우리별’이라고 지었을까요? 여기에는 특별한 사정이 있습니다. 원래는 영어 이름인 KITSAT-1호라고 부르던 것을 공모전을 통해서 지금처럼 변경한 거예요. 그 이유는 비록 소규모지만 외국 기술의 도움 없이 자체적으로 제작했다는 자부심 때문이었습니다. 또 앞으로도 계속 후속 모델을 만들어 내겠다는 의지이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이듬해 2·3호기를 잇달아 발사해 1999년 5월에는 성능향상형 4호기까지 성공적으로 안착시켰습니다. 그리고 2000년 12월 21일 마침내 최종 완성판이라고 할 수 있는 5호기까지 궤도에 진입시킴으로써 명실상부한 우주시대의 개막을 알렸습니다. 특히 군사 목적이 아닌 순수 과학 연구용으로는 처음이었습니다. 그럼 왜 하필 이름을 ‘우리별’이라고 지었을까요? 여기에는 특별한 사정이 있습니다. 원래는 영어 이름인 KITSAT-1호라고 부르던 것을 공모전을 통해서 지금처럼 변경한 거예요. 그 이유는 비록 소규모지만 외국 기술의 도움 없이 자체적으로 제작했다는 자부심 때문이었습니다. 또 앞으로도 계속 후속 모델을 만들어 내겠다는 의지이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이듬해 2·3호기를 잇달아 발사해 1999년 5월에는 성능향상형 4호기까지 성공적으로 안착시켰습니다. 그리고 2000년 12월 21일 마침내 최종 완성판이라고 할 수 있는 5호기까지 궤도에 진입시킴으로써 명실상부한 우주시대의 개막을 알렸습니다.